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세/정치사/중기/이탈리아 반도 (문단 편집) ===== 교황청의 부패와 동서 분열의 시작 ===== 《가톨릭 백과사전》에 의하면, [[베네딕토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나이는 20세라고 한다. 하지만 11세나 12세였다고 전하는 기록들도 존재한다. 베네딕토 9세는 굉장히 방탕하게 살았다고 전해지며, 권세 있는 유력한 집안에 속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교황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정통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입장이었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를 가리켜 부도덕한 행위를 즐기던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반교황주의 역사학자인 페르디난드 그레고로비우스는 “지옥에서 온 악마가 사제의 탈을 쓰고 베드로좌를 차지하였으며, 불손한 언행으로 교회의 거룩한 신비를 모독했다”고 평가했다. 《가톨릭백과사전》 또한 베네딕토 9세를 가리켜 ‘베드로좌를 더럽혔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남색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교황궁인 라테라노 궁전에서 주지육림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베네딕토 9세는 당시 피아첸차 교구장인 벤노 주교로부터 추잡한 간음과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교황 빅토르 3세는 자신의 대화록 3집에서 “베네딕토 9세는 강간과 살인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폭력과 남색 행위를 저질렀다. 교황으로서 그의 삶은 극도로 불쾌했으며, 상스러웠고, 형편없었으며, 나는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고 비판했다. 그의 재위 12년 간은 평화스러워 크레모나와 스펠로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도 자유롭게 만나고 마르세유도 여행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이 불법적으로 밀라노의 대주교 헤리베르트를 파직시키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였다. 1044년 9월 로마에서 크레센티파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베네딕토 9세를 내쫓고 1045년 1월 사비나의 주교 조반니가 교황 [[실베스테르 3세]]로 명명하여 교황좌에 올랐다. 하지만 3개월도 못가 베네딕토 9세는 1045년 4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실베스테르 3세를 내쫓고, 다시 교황직에 복귀하였고, 로마에서 쫓겨난 실베스테르 3세는 본래 자신의 교구였던 사비나 교구로 돌아갔지만 자신은 정당한 교황임을 주장하며 복귀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1045년 말, 베네딕토 9세는 거액의 돈을 받고 요한 그라시아누스에게 교황직을 양도하였다. 요한 그라시아누스는 교황 [[그레고리오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앉았다. 베네딕토 9세가 사임한 이유는 혼인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사바나 교구로 돌아간 실베스테르 3세는 여전히 정통 교황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베네딕토 9세는 이를 번복하여 사임의 뜻을 철회하고 다시 자신이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적지 않은 성직자에게서 목자다운 능력이나 품성을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한 그레고리오 6세는 고뇌에 가득 찼다. 그렇지만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 신부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올바로 쇄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신과 교회회의라는 수단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애썼으며, 정치 사회 면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던 경쟁 파벌들의 세력은 너무나 막강해 쉽게 굴복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혼란스러위지자 개혁파 성직자들이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황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046년 가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방문하였다. 그레고리오 6세는 자신의 교황즉위 과정이 교회개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였기에 죄가 될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인리히 3세를 만나러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하인리히 3세로부터 교황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그의 요청에 따라 수트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때 실베스테르 3세 역시 교회회의에 참석했다. 1046년 하인리히 3세가 개입하여 소집된 수트리 공의회에서는 베네딕토 9세와 실베스테르 3세의 교황직 박탈을 선언하였고, 특히 실베스테르 3세는 처음부터 교황좌를 강탈한 자로 간주되어, 성직품 자체를 박탈당하고 여생을 수도원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6세에게는 사임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그레고리오 6세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베네딕토 9세에게서 돈을 받고 교황직을 넘겨받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오 6세는 교황직을 매수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러한 행동이 성직매매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교회회의의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6세에게 그와 같은 행위는 사실상 성직매매라는 것을 이해시키며, 그에게 교황직 사임을 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6세는 자신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교회회의의 요청에 따라 스스로 교황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하인리히 3세와 동행했던 밤베르크의 주교 수이드거가 그레고리오 6세의 뒤를 이어 교황좌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교황 [[클레멘스 2세]]이다. 클레멘스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그는 하인리히 3세와 함께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하인리히 3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봉하는 대관식을 집전하였다. 1047년 로마 시노드를 소집하여 성직매매를 금지하는 규정을 제정하는 등 교회 개혁을 시행하였다. 라벤나 주교좌와 밀라노 주교좌, 아퀼레이아 주교좌 간에 벌어진 우위권 논쟁은 라벤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클레멘스 2세의 선출은 훗날 교황청 내 개혁파로부터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다른 교구의 주교였다는 것과 세속 군주가 개입했다는 점 때문에 비판받았다. 클레멘스 2세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옛 주교좌를 그대로 보유함으로써 로마 교구와 밤베르크 교구를 동시에 사목하였다. 클레멘스 2세는 하인리히 3세를 대동하고 이탈리아 남부로 개선 행진을 했으며, 하인리히 3세의 요청에 따라 925년 헝가리인들에 의해 순교한 비보라다 수녀를 시성하였다. 한편 베네딕토 9세는 수트리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폐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047년 8월 클레멘스 2세가 로마로 돌아오는 도중 선종하자, 베네딕토 9세는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시오 3세]]를 찾아가 자신의 복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3세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보니파시오 3세는 그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베네딕토 9세는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양의 금을 뇌물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토스카나 후작의 지원을 받아 그 해 11월에 라테라노 궁전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이미 교황청은 하인리히 3세와 함께 미리 다음 후임으로 티롤 지방의 브릭슨 교구의 교구장인 포포 주교를 정한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새 교황으로 지명된 포포는 울름까지 하인리히 3세의 안내를 받아 이탈리아로 내려갔는데, 이 때 교황청 재산이 거의 파산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포포는 자기 본래 교구의 수입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특별히 허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1048년 알프스에 있는 푸스터 골짜기의 유명한 산림지대를 포포에게 준다는 증서도 작성되었다. 하인리히 3세는 포포를 호위하기 위해 자신이 자리를 비울 경우 반란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토스카나 후작 보니파시오 3세에게 황명을 받들어 포포를 직접 로마로 안내하고 그를 새 교황으로 안전하게 즉위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9세가 교황좌를 찬탈할 당시 적극 협조했던 것과 하인리히 3세에 대한 태도로 볼 때, 보니파시오 3세가 토스카나에 도착한 포포에게 "나는 당신과 함께 로마로 갈 수 없소. 로마인들은 베네딕토를 다시 교황으로 복위시켰고, 그는 도시 전체를 자기 편으로 만들었소. 게다가 나는 이제 너무 늙은 몸이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포포는 결국 독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독일로 돌아간 그는 하인리히 3세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알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하인리히 3세는 크게 격노했다.포포는 하루속히 베네딕토 9세를 추방하고 후임 교황을 즉위시키라는 하인리히 3세의 서찰을 갖고 보니파시오 3세를 다시 찾아갔다. 하인리히 3세의 글은 간단명료했다. “네가 돈에 눈이 멀어 짐의 명령을 거스르고, 교회법에 따라 물러난 교황을 다시 복위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네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짐이 친히 너를 찾아가 엄히 꾸짖을 것이다.”하인리히 3세의 경고에 겁을 먹은 보니파시오 3세는 마음을 돌이켜 1048년 7월 군대를 로마로 보내 베네딕토 9세를 강제로 추방시켰다. 베네딕토 9세가 물러난 후, 포포는 승전군처럼 로마에 입성하였다. 로마 시민들은 모두 기뻐하며 장차 교황이 될 그를 환영하였다. 포포는 1048년 7월 17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다마소 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의 재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무 뜨거운 로마의 열기에 지친 다마소 2세는 팔레스트리나로 잠시 피신했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24일이라는 짧은 재임 끝에 그 해 8월 9일에 다마소 2세는 선종하였다. 사후 그의 시신은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 해 12월에 보름스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툴의 주교인 브루노가 다음 교황으로 지명되었다. 황제와 로마의 사절단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정작 브루노 본인은 교회법에 따른 선거를 원했기 때문에, 후임 교황은 로마로 가서 로마 교구의 성직자들과 교구민들의 목소리에 따라 자유롭게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바로 출발한 브루노는 브장송에서 클뤼니의 위그 수도원장과 만났으며,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젊은 수도자 일데브란도가 이 때 브루노의 여정에 동참하였다. 브루노는 다음해 2월 순례자 차림으로 로마에 도착하여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마침내 로마 교구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교황직을 수락하여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주교좌에 착좌하여 교황이 되었다. 새 교황의 주위에는 젊은 개혁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르미르몽의 위그, 로렌의 프레데리크, 훔베르트, 일데브란도 등 모두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레오 9세는 가톨릭 개혁에 임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도덕상을 제시하였다. 교황이 된 후 그의 첫 번째 공적 활동은 1049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시노드를 소집한 것이었는데, 이 시노드에서는 (차부제까지 포함한) 성직자들의 독신을 재차 요구하였다. 또한 시노드 회의장에서 레오 9세는 성직매매를 반대하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뒤이은 그 해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 전역에 대한 사목 방문으로 할애하였는데, 이는 레오 9세의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파비아에 소집된 시노드를 주관한 레오 9세는 이후 작센에서 하인리히 3세와 만나 쾰른과 아헨까지 그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랭스에서 고위 성직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회 쇄신 방안이 합의되었다. 마인츠에서는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성직자들이 대거 모인 교회회의를 소집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보낸 사절단도 참석했다. 마인츠 교회회의에서도 주요 안건은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혼인 문제였다. 이때 끝까지 자신의 폐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베네딕토 9세는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되어 파문당했다. 또한 레오 9세는 프랑스에서 서임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1049년 3월에 열린 랭스 공회의에서 레오 9세는 프랑스 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을 주장했고, 당시 프랑크의 국왕이었던 [[앙리 1세]]는 왕권이 약화된 터였기에 레오 9세의 주장은 관철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남부는 노르만족의 계속된 침략으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은 이를 타개하고자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풀리아의 윌리엄에 의하면, 동로마 제국은 레오 9세 교황에게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자유를 되찾게 해주고, 아풀리아 지역을 장악해 그곳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저 악랄한 민족이 속히 물러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1053년 제4차 예수 부활 대축일 시노드가 폐막된 후, 레오 9세는 직접 이탈리아인 병사들과 슈바벤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 군대를 격퇴하러 출병하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노르만족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교황과 싸우기를 꺼려 협상을 요청했으나, 슈바벤 용병들이 그들을 조롱하자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레오 9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었지만, 그의 군대는 1053년 6월 15일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1053년 6월에서 1054년 3월까지 레오 9세는 노르만족에게 항복한 후, 베네벤토에 인질로 잡혀 지냈다. 하지만 포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결국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로마로 돌아왔다. 죽기 전까지 콘스탄틴의 유증을 빋었던 레오 9세는 1054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로부터 서신 하나를 받았는데, 서신에는 서방 교회가 [[효모]]를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한다는 것과 단식일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미카엘 총대주교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교황은 총대주교에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1 (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쓴 것으로 알려진 위조 칙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로마와 제국의 서방 영토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대신 자신은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조작된 칙서는 중세 시대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은 위조된 것이 아닌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인 로마의 교황만이 전체 교회의 최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냈다. 이렇게 동방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와 갈등을 빚은 교황은 선종하기 전에 실바칸디다의 훔베르트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임명한 후 동로마 제국으로 파견했다. 훔베르트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파문한다는 칙서를 동방 교회 측에 전달했고,[* 당시 그가 동방 교회 측에 칙서를 전달했을 때 레오 9세는 이미 선종한 후였고, 교황의 특별한 지시 없이 단독적으로 행동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 교회법적으로 무효였다.] 이에 반발한 미카엘 총대주교가 훔베르트 추기경을 포함한 교황 특사 수행원들을 파문하는 칙서를 공표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그렇게 1054년 [[동서 대분열|동서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054년 4월 19일, 레오 9세는 선종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